한국에 두 아들을 바친 선교사 곽안련
1902년에 한국에 파송된 Charls Allen Clark 선교사는 한국이름 곽안련 선교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시카고 대학에서 석사학위와 Ph D 학위를 받았고 한국 선교사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는 맥칼레스터 대학을 졸업하고 중부의 프린스톤 맥코믹 신학교에 진학해 선교사로서의 훈련을 했는데 놀라운 사실은 맥코믹 신학교 졸업반 44명중에 해외 선교를 지원하는 사람이 18명이었고 그들 모두가 한국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한국을 깨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열심이셨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신학교를 졸업하기 4개월 전에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항복하였다. 그리고 주님께 사랑하는 주님, 주님이 가라시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라고 고백했다. 이때 교단의 해외 선교부는 나에게 선교 신청서를 보내왔다. 사실 그동안 나는 이것을 피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러나 이제 나는 차례로 ‘한국’ (한 사람의 친구가 거기에 다녀온 적이 있었으며 밤낮으로 그곳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중국’, ‘일본’ 이라고 썼다. 그러나 공란에 또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만약 선교부가 당신이 희망한 장소 중 어느 곳이라도 보낼 수 없다면 그대는 선교부가 보내는 세계 어느 곳이라도 기꺼이 가겠는가? 나는 여기에 정말 서명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나는 두 주간을 기도한 후에 마침내 여기에 서명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거기에 서명할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 반의 급우 44명 가운데 18명이 해외 선교지에 그것도 한국에 나가겠다고 자원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한국은 정말 하찮은 존재였고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결국 나는 급우 18명중 나의 단짝이었던 컨즈와 단 둘만이 한국으로 갈수 있었다.
그는 18:2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한국에 온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한국에 파송된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정말 뛰어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고전어인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는 물론이고 불어 독일어까지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 들의 영향력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 강력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한 곽안련 선교사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한국 선교지에 도착한지 일년도 되기 전에 자기의 사랑하는 첫 아들, 둘째 아들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부산에 접근했다가 한국의 남쪽 끝을 돌아 1902년 9월22일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우리가 상륙할 때는 마침 전염병인 콜레라가 한창이었다. 이로 인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얼마 후에는 천연두가 엄습하여 어린이들의 시체가 수백 명씩 서울의 동대문 밖으로 실려 나가 수마일이나 퍼져있는 둥그스름한 분봉사이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성홍열이 습격해와 우리의 첫 사내아이를 앗아갔다. 그 다음에는 두 번째 사내아이가 우리를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는 두 아이를 일년 안에 잃었다. 선교사가 되면 때론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곽안련 선교사는 몇 명의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기도 했는데 9명의 여자아이와 7명의 남자아이를 정성껏 양육했다. 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정부 요직에 까지 나서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 중 한 사람은 1919년 3.1 운동을 발화시킨 주인공이 되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부통령을 지냈던 함태용 목사이다.
또한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42권의 책을 저술했다. 특히 그는 표준 성경을 비롯해 성경주석, 평양신학교의 여러 교재들, 그리고 신학지남에 남긴 논문들을 통해 초창기 한국 신학의 맥을 형성하는 초석이 되었다. - 옮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