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자료실

제목술에 취한 노숙자의 욕설2024-11-18 06:32
작성자 Level 10

서울역 광장의 아침은 술에 취한 노숙자의 욕설과
지린내와 토한 오물 등이 섞여서 악취를 풍겼습니다.
정군을 마중하기 위해 서울역에 나왔는데
그는 아침부터 서울역 주변의 한 식당에서
나이 든 노숙자들과 국밥에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담배를 피우며, 농담하며 희희낙락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못하면서도 노숙자들과는
편하게 이야기하고, 술 마시고, 뒹굴며 사는 스무 살 정군의 배낭에는
시커먼 운동화와 구겨진 옷 몇 벌과 칫솔과 곰팡이 핀 떡이 있었는데 
거기서 풍기는 악취 때문에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났습니다. 

 

정군은 주택가에 연쇄적으로 불을 질렀다가 체포돼 재판을 받고
소년범 
치료시설에서 6개월간 생활하다 지난 1월에 출소했습니다.
정군의 유일한 보호자는 팔순을 앞둔 할아버지입니다.
정군은 할아버지와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습니다.
하지만 알코올 중독이 재발되면서 일터에서 잘리고 말았고,
백수가 된 뒤에는 할머니가 남긴 패물을 팔아서 술을 먹었습니다.
노숙자와 술을 먹고는 술값을 내지 못해서 술집에 잡혔던 사건으로
할아버지에게 혼이 난데다 백수로 지내는 게 눈치가 보였던 정군은
답답한 생활에서 벗어나려고 또 다시 가출하고, 노숙자로 지냈습니다.

 

정군의 방황이 답답하긴 하지만 그 인생을 보면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정군의 아버지는 러시아에 유학을 갔다가 러시아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소련 공산당 간부의 딸이었던 그 여인은 정군을 1995년 모스크바에서 낳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깨지면서 러시아 여인은 자식을 버리고 떠났고
정군은 두 살 때, 할머니의 품에 안겨서 한국에 왔고, 모스크바에 남았던
정군의 
아버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아픈 상처 중에 가장 아픈 상처는
자신을 낳아준 엄마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차라리, 엄마가 죽었다면 아예 잊어버리고 말 텐데
차라리, 엄마가 가까이 있다면 만나기라도 할 텐데
너무나 먼 나라 그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리움이 병이 되고, 분노를 참지 못해 방화범이 되었습니다.

 

정군은 중학교 2학년이던 열다섯 살에 처음으로 가출했습니다.
왜 가출했는지 물었더니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의 잔소리도, 친구 없는 학교도 싫어서 가출했다고 했습니다.
가출한 뒤 뚝섬에서 노숙생활을 하는 김씨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파지와 깡통을 고물상에 팔아 컵라면과 빵을 사먹었다고 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걸리게 된 이유를 묻자 정군은 아래처럼 말했습니다.

 

"고물 중에서 가장 값을 비싸게 쳐주는 게 맥주 캔인데요.
여름이면 맥주 캔을 줍기 위해 청담대교 밑으로 갔어요.
남녀가 치킨과 캔 맥주를 남기고 뜨면 잽싸게 달려가서 치킨을 집어 먹고,
맥주 캔을 챙기면서 남긴 맥주를 호기심에 마셨는데 기분이 괜찮았어요."

 

정군의 외로움을 달래준 것은 술이었습니다.
조부모는 양육에 실패했고, 교회는 아픔을 감싸지 못했습니다.
정군에게 세상은 불안하고, 괴롭고, 슬픔을 안겨줄 뿐이었는데
알코올은 그냥 마시는 대로 위로해주었기에 소년은 술꾼이 되어
거리를 휘청거렸고, 돈이 궁하면 행인들에게 앵벌이를 했습니다.
저는 염려했지만 정군은 노숙생활이 날마다 재미있었다고 했습니다.
잠은 을지로 지하도에서 자고, 아침은 서소문 무료급식소에서 해결하고,
아침을 먹은 뒤엔 
조계사에 가서 보살님들과 고양이와 새끼까치와 놀다가
반야심경을 따라 외워도 보고, 가부좌를 틀다 공양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으면 서울역과 청량리역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남해 바다가 보고 싶어서 도둑기차를 타고 여수를 가려다가 단속됐고,
그래도 마음이 우울해서 다시 도둑기차를 타고 원주까지 갔다가 왔다했고,
꽃동네에 갔는데 맘에 들지 않아서 도둑기차를 타고 상경했다고 했습니다.

 

지난 6월 13일에 소식이 끊겼던 정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경상도의 한 재활치료병원이라고 해서 면회를 가겠다고 했는데
아니라 다를까 병원 관계자에게 금방 연락이 왔습니다.
말을 빙빙 돌리면서 말했지만 정리하자면 단순합니다.
정군이 연쇄방화범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병원에 불을 지를까봐 불안하니 목사님이 인수인계하라고….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서울역으로 정군을 마중갔습니다.

 


연쇄방화 사건으로 정군의 사연을 알게 된 뒤에는
다문화를 왕따시킨 사회가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아픔 해소에 앞장서왔던 저는 그래서
수감된 정군을 만나기 위해 성동구치소를 찾아 갔습니다.
국회의원 71명에게서 탄원서를 받아 판사에게 제출했고,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으로 가엾은 정군의 선처를 구했습니다.
판사님께 탄원서를 드린 덕분인지 6호처분을 받은 와중에도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2개월 동안 입원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6호처분을 마치고 출소한 뒤에는 진지하게 대화를 했습니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가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루기로 했고,
예전의 방황과 아픔을 단절하고 새롭게 출발하기로 약속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할 선생님을 정하고,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정군은 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잘못은 정군이 아니라 저에게 있었습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제안하고 설득한 저의 잘못입니다.
다시 돌아온 정군을 목욕탕에 보내 노숙의 때를 씻게 했지만
악취가 진동하는 빨래들을 세탁기에 돌리고 돌려 빨았지만
여름옷과 속옷을 사다 입히면서 이젠 같이 살자고 했지만
삼겹살로 저녁을 먹으며 운전을 배우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운전면허 필기시험 책을 사주었더니 좋다며 웃기도 했지만
그런데, 또 다시 사흘째 소식이 끊겼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제 수첩 속의 정군 사진을 꺼내놓고 막막함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정군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정군을
그 상처 때문에 노숙자로, 알코올 중독자로
앵벌이 하며 떠도는 저 어린 양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장마가 시작된 이 밤에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돼
정군이 배회하는 을지로, 종로 어디로 찾아나서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