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영원토록 남는 사람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60년대, 우리 집 가까운 옆집에 강묵이 엄마라고 사셨는데, 홀로 외롭게 사시면서도 여러 번 딸 자랑을 하셨다. “우리 딸은 독일에 간호사로 갔는데 고추장이 먹고 싶으니 좀 보내달라는 편지가 왔어....” 어린 나이에 미국이나 독일이라는 말만 들어도 미지의 세계인 듯 호기심이 발동했다. “누나는 좋겠다. 누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도대체 어떻게 살고 있을까?....”하면서 나름 상상하고는 했다. 그런데 며칠 전 파독 간호조무사 강정희(66세.15년 獨간호조무사로 근무하면서 마취과 전문의 되다)씨 관련기사를 접하고 강묵이 누나와 연배가 같다는 것을 알고는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졌다. 6.25 전쟁을 막 끝내고 폐허가 된 우리나라는 경제재건 때문에 독일에 많은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했다. 그때 강정희 씨는 간호조무사로 독일을 갔는데, 그녀의 헌신적인 눈물겨운 삶의 이야기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기에 충분하여 여기 잠깐 소개한다. 아래의 글은 - 그 50년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에서 요약한 것이다. 6·25 전쟁 이후 모두가 살기 어려운 시절, 강씨 가족에게도 가난은 숙명이었다. 충남 지역 면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전쟁 이후 막노동에 나섰다. 살림만 하던 어머니는 바늘 실 비누를 파는 방물장수가 됐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맏딸 강씨에게 고등학교 진학은 사치였다. 보건소 직원으로 홍산면 사무소에서 결핵환자 관리원으로 일했다. 그때 파독 간호보조원 모집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됐다. 강씨는 '가족을 가난에서 구해내겠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강씨는 23세 때인 1970년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독일에 갔다. 뒤스부르크시립 산부인과·소아과 병동에서 일을 시작했다. 다른 병원에서 야근과 주말 근무를 자청했고 휴가도 없이 일했다. 힘겹게 번 돈은 가족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로 보냈다. 강씨는 이렇게 번 돈으로 동생 넷에게 대학 공부를 시켰다. 그 동생들은 지금 각각 대기업 간부, 중학교 교사, 의사로 일하고 있다. 강씨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면서 슈바이처 박사처럼 인술을 베푸는 의사가 되겠다는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의대 진학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가난을 핑계로 어릴 적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의지를 하늘도 도왔던 것이다. 그녀는 대학 진학을 위해 필요한 '아비투어(독일 대학 입학 자격)'를 위해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4년제 야간학교에 다니기로 했다. 하지만 야간학교 수업시간과 병원의 밤 근무시간이 하루 2시간쯤 겹쳤다. 그가 학교 수업에 제때 가지 못해 애를 태운다는 걸 알게 된 동료 간호사들은 품앗이를 해 강씨를 도왔다. 그녀는 야간 수업을 마친 후엔 차비를 아끼려고 병원까지 30분을 뛰었다. 땀에 젖은 채 가운을 갈아입고 밤 10시부터 근무를 했다. 그는 뒤스부르크 시립병원과 당초 계약한 3년 근무를 마친 후 계약 기간을 4년 더 연장했다. 독일서 간호조무사 생활을 시작한 지 7년 만인 1977년, 그는 드디어 의대 입학에 필요한 야간학교를 마쳤다. 강씨는 "한국인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이 계약 기간을 마칠 때쯤이면 병원 측에선 '어떻게 연장 계약을 맺을까' 고심하는 눈치였다"고 했다. 한국인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에 대한 평가가 그만큼 좋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계약 연장에 동의하면 병원 식구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1978년 헤센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독일 입학생보다 열 살이 많은 만학도 였다. 그래도 간호조무사 생활은 그만두지 않았다. 의대에 다니던 7년 동안에도 방학과 주말에는 간호조무사 생활을 병행해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은 꼬박꼬박 고향집에 부쳤다. 부모님은 딸이 부친 돈으로 고향에 땅을 사 농사를 지었다. 강씨는 "독일에서 일하며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부치는 생활이 전혀 고되지 않았어요. 가난한 부모님을 돕고 똑똑한 동생들을 공부시킬 수 있다는 게 마냥 기뻤지요.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독일에서 급히 귀국해 전날 장례를 치뤘을 때, 동생이 '언니가 없었으면 우리가 이만큼 살 수 없었다' 면서, 어머니를 떠나보내 마음이 허전하지만 동생의 그 말에 위로를 받았고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6남매의 장녀인 강씨는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다섯 동생이 어머니를 잘 보살펴 드렸으니 동생들에겐 고마운 마음뿐"이라고도 말했다. 강씨는 의대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독일 여러 병원에서 마취과 의사로 일하다 지난해 라인란트팔츠주 병원에서 은퇴했다. 의대에서 지금의 독일인 연하 남편을 만나 슬하에 아들 한 명을 뒀다. 그녀는 또 “간호조무사 겸 의대생으로 지낸 과정이 쉽지 않았지만 가족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뻤다”고 말한다.... 형태는 다 각각 다르겠지만 대개의 선량한 인간 삶은 대체적으로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때로는 고뇌하고 적합한 삶을 찾으려고 몸부림치고 치열하게 사랑하고 그리고 때가 되면 까만 씨 하나 미련없이 남겨놓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과연 사람은 잊혀지는 존재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누구나 때가 되면 이름 석 자 앞에 옛 고(故)자 하나가 붙게 되어있으니까. 살아보려고 그렇게도 보채고 애쓰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벌써 많이도 사라져 갔다. 웬지 모를 눈물이 나려고 한다. 계절은 여지없이 돌아온다. 올해도 겨울이 가고 봄이 돌아오는 길목에 섰다. 하지만 잊혀 진 사람은 돌아올 줄 모른다. 사람이 계절만 못하단 말인가. 노래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돈다.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고려 때의 충신 길재도 이와 비슷한 그 어떤 것을 느껴서 시조 한 수 읊조린 것 아닐까.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보니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늘 보는 산과 강, 땅과 나무, 흙과 돌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그대로다. 그러나 여기서 울고 웃으며 살던 주체였던 사람만은 가고 없다. 도대체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차디찬 지하세계 그 어디에 한줌의 흙으로 누워 잊혀 진 것인가? 오! 그럴 수는 결단코 없다.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사람은 영원히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고 한다(요일1서2:17).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 사람,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다. 어떤 동물은 상한 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어떤 동물은 상한 고기만 즐겨 먹는다.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식대로 적응하며 살도록 지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쪽으로 살아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죄의 진흙탕 속에서 끝을 볼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맑은 하늘을 날며 살 것인가 스스로 자기 길을 선택해야 한다. 세상에는 자기 길을 가면서도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빛 가운데 걸어감으로 빛의 천사들이 형통하도록 앞서 올무를 치워주는 지혜로운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요한 1서2:10-17).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남을 사람! 하나님이 받으시어 영원히 빛날 보석이 되게 하는 사람! 이 약속의 말씀이 존재하기에 사람은 영원한 가치를 찾아 나설 수 있고, 영원한 뜻에 기꺼이 목숨을 던질 수도 있고, 영원한 소망을 꿈꿀 수도 있다. 세상의 온갖 허무를 넘어서서 존재의 의미로 가득 채우고, 부정(否定) 대신 긍정(肯定)을, 다툼 대신 평화를, 죽음 대신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노래할 수 있다. * 자나 깨나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품고 살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마5:1-12 왕상2:16 시20:4). * 그리스도인은 이유 없이 악하게 대하는 자에게도 선하게 대하고, 이치에 맞지 않아도 맞서지 않는 사람이다. (벧전3:8-11. 4:12-16)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울 때 겁과 두려움이 없음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시23:3 시27:1 요일4:18). * 하나님께 사랑하심을 입고 은혜 받은 자는 죄 사함 받은 자, 하늘 영광을 보는 자, 하늘 문이 열린 자, 신령한 복을 기업으로 받은 자다(눅1:30 마17:5 마9:2). * 하나님은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기에 안심하고 그분께 나를 맡길 수 있다. 그 순간 평온한 안식을 느끼고 새 힘을 얻는다(시107:30 벧전5: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