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선교를 위한 성서적 기초
현재 한국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외국인 이주민으로 인해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다문화 현상은 국제결혼과 같은 요인 때문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이 한국사회에 정착해서 생활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한 통계에 의하면 2015년 현재 17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다문화선교의 대상은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5천만 명 인구 중에 170만에 불과한 이들에 대한 다문화선교는 한국교회의 시급한 선교과제로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다. 노인선교, 장애인선교, 청소년선교, 농어촌선교, 학원선교, 노숙자를 위한 선교 등 지역교회나 지역사회가 당연한 선교과제에 우선순위가 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교회들이 아직까지 다문화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문화선교는 여러 가지 특수한 선교영역들 중 하나로만 취급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급하게 수행해야 하는 여러 선교과제들 중 하나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다문화적 특성을 성서에서 밝혀봄으로, 이 영역에서 봉사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한다.
1. 선교의 다문화적 특성
성서에 표현된 선교는 처음부터 다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과 해방을 하나님 선교의 기본적인 형태라고 한다면 더욱 더 다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다양한 문화를 지닌 여러 인종들이 모여 하나의 하나님 백성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12지파 형성이 야곱의 열두 아들로부터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다윗 왕조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라면, ‘히브리’의 어원인 ‘떠돌이 잡족(하피루)이 모여 이스라엘을 형성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기원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 같다 :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겔16:3)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다문화 인종으로 이루어진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성서 기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원형으로서 이스라엘이나,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서 이스라엘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 백성의 다문화적 특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마태가 전하는 예수의 족보를 참고해야 한다. 예수의 조상인 이스라엘은 가나안 여인 다말, 여리고의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 가나안 인이었던 우리아의 아내가 편입되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 세상에서 이름을 드높이고 큰 민족을 형성하여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창 12:2-3), 인종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구원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세계의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유목민이었던, 혹은 ‘유리하는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고 한 국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야훼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나안의 문화는 물론 인근 부족의 문화적 요소들을 수용하게 된다. 민족 국가를 형성한 후에도 이스라엘의 주변의 거대한 강대국들의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들만의 신앙과 전통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형성과정에서 문하 상호간의 특정 요소에 대한 수용과 거절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교과정이 끊임없이 발생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선교의 다문화적 특성은 선교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 다문화선교에 걸림돌인 이스라엘
그런데 성서는 다문화선교에 걸림돌이 되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표현들을 가득 담고 있다. 가나안(함족속)은 형제의 종노릇하도록 되어 있다는 저주나(창 9:25), 이스라엘의 행진을 방해하는 모든 부족을 ‘진멸’하고 그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신 7:1-3)하나님의 보편적 선교에 반하는 내용들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사마리아는 앗수르와의 관계 때문에 저주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 중 이방인 아내와 그들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모두 추방할 것을 명한다.(스 10:3)이스라엘은 다문화 가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처음부터 다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종교가 이방인의 개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다문화선교를 거절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마 23:15)라고 하신 말씀에 의하면, 간혹 이방인 개종자를 얻기 위해 노력하던 유대교인이 있었다고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 이스라엘 백성이 고수하려고 했던 특수주의적 선민사상으로 무장한 철저한 율법주의자가 되고 만다는 뜻도 포함한다. 특수주의적 배타적 선민사상이 다문화선교와는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예수께서는 다문화선교에 역행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보편적 선교 사상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자신이 행하시던 선교를 행하라고 12제자들을 파송할 때,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명하신 것은 전형적인 유대교 선교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고쳐달라는 가나안 여인에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고 하시면서 여인의 간청을 거절하는 것도, 단순히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의 이 두 본문은 예수께서 다문화선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제자들을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사마리아인과 이방인에게 배타적이었던 민족 정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순수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전통을 전수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전통은 다문화선교에 걸림돌로 보여 질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히 ”모든 민족에게 가서“(마 28:19)라는 명령만으로 다문화선교를 수행할 수는 없다. 배타작인 민족주의에 근거한 유대교적 선교와 하나님의 보편적 선교는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3.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다문화선교
다문화선교를 위해 성서에서 규명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이방인 선교에 대한 이해이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야곱의 열두 아들에 근거를 둔 지파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다문화선교는 설 자리가 거의 없다. 유대교 선교와는 달리(기독교) 원시공동체의 선교는 적극적인 이방인 선교를 수행하면서 발전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 신자와 헬라파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은 문화적 경계선을 넘어가기 힘들었던 과정들을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의 표현에 의하면 유대인에게 당시 이방인은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행 10:14)존재로 인식되었다. 급증하는 할례 받지 않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의 원시공동체 유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론은 유대교의 음식에 관한 정결법을 준수하는 조건으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행 15:19; 29; 21:25) 안디옥에서 베드로와 바나바가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의 제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했던 일을 바울이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기사는 (갈 2:11-14) 예루살렘 공동체에 의한 다문화 선교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의 생각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갈 3:14)하려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비였다.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까지 복음이 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대체 왜 이방인이 차별을 받아야 했는가? 여기에서 다문화선교의 대상인 이방인의 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게르’로 규정하면서 시작한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난 땅과 근본은 가나안“ 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까지 이 곳 저 곳을 떠돌아다니던 나그네 신세였다. 수백 년 동안의 이집트에서의 삶은 나그네보다도 못한 노예 신분이었다. 반복적으로 ”너희가 애굽에서 객 되었을 때“를 기억하라고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읽어야 한다.
나그네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근거해서 도피성의 규정이나 약자 보호법 안에 나타나는 “너희 중에 거하는 나그네”에 대한 선교는 지엽적인 과제가 아니다.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기억한다면, 이스라엘 내의 이방인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언이다. 이방인으로 살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고 (정착 초기에는 역시 노예나 소작인의 신분으로 나그네였지만)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면서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망각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 왕조가 시작되면서 ‘게르’는 비유대인(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물론 이스라엘 내에 거류하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밖에 있는 이방인의 구분을 두어야 하지만, 이스라엘 내의 이방인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솔로몬의 성전봉헌 기도에 나타나는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이스라엘 백성처럼 되게 하겠다는 표현은 (왕상 8:41-43) 다문화선교의 예로 들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이방인은 사회∙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이들일 것이다. 이주 농업 노동자 혹은 성전건축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윗 왕조의 후반기에 남왕국 유대는 앗수르의 침공에 의한 사마리아(북왕국)의 몰락 때문에 생겨난 난민의 유입이 있었다. 이 이주민들은 많은 사회적 갈등을 양산했으며, 히스기야는 종교개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히스기야 시절 유월절에 참석한 명단 가운데 나타나는 이방인의 존재는 ‘게르’의 개념이 변했음을 보여 준다: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모든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들과 유다에 사는 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였으므로 ”(대하 30:25), 남북 왕조의 사람들이 다 같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라는 표현은 민족의 정체성이 축소되었음을 뜻한다. 히스기야는 북왕국의 사람들도 함께 이집트에서 게르였음을 인식하고 사회통합을 이루려고 하는 개혁을 단행했지만, 요시아 시대에 이르면 누가 참된 이스라엘이냐에 대한 문제로 비화한다.(남왕국 백성만이 참된 이스라엘, 즉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고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 후기에는 “귀화한 자들”과 “그 땅에 살고 있던 자들”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도 참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누구에게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귀환한 자들’이 ‘남은 자’일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또 다시 ‘나그네’로 귀환한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이 제사법전과 성결법과 약자 보호법에 게르를 포함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포로기 이전에 게르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이주민을 가리키지만, 포로기 후기의 게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하고 있다. 게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세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용어로 발전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페르시아에 의해 포로에서 해방되기는 했지만 주권 국가를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땅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곧 게르였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관한 신학의 발전을 보아야한다. 이스라엘 족장 때부터 포로 후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줄곧 게르였다는 고백이다. 가나안 땅에서 게르가 아니라, 하나님의 땅에서 게르였다는 인식이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 거주하는 나그네일 뿐이라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오늘날 다문화선교의 핵심적인 기초가 되어야 한다.
4. 다문화선교를 위한 성서적 이해
아브라함이 게르였고,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 백성이 게르였다. 떠돌이와 나그네로 살았던 이스라엘은 ‘나그네’ 신학을 이렇게 표현한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시 39:12)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시 119:19)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 이 땅에서 나그네라는 인식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모두가 하나님 땅에 거하는 나그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문화선교라는 용어 자체도 재고해야 할지 모른다. 서로 상이한 문화를 지닌 대상으로 선교를 해야 하기에, 그리고 선교는 문화 상호간의(cross-cultural)절차와 현상이기 때문에 다문화선교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선교의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다문화적 선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땅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나그네로 인식한다면, 다문화선교라는 용어 자체가 필요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문화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디아스포라선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런 신학적 사고가 자칫 타계적 신앙만을 조장할 수 있는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이주민들만이 나그네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그네라는 인식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인은 수천 년을 이 땅에서 살아 왔지만, 이 땅이 우리들만의 땅이 아니라는 신학적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했듯이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필요하다.
이런 신앙고백이 기초한 다문화선교, 곧 하나님의 선교 그 자체이다. 눈물을 흘리며 고통 중에 부르짖는 나그네인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선교사 모세를 보내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고통 받고 있는 수많은 이주민(나그네)들을 위해 선교사를 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이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생활하는 이주민과 다문화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위해 오실 것이라는 서고가 필요하다. 선교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문화선교는 ‘성육신의 신학’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현대신학에서 성육신의 사건을 ‘신의 세속화’로 표현하곤 한다. 신적인 문화를 버리고 세상의 문화 속으로 오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은 그러므로 다문화선교의 핵심적인 틀일 것이다. 다문화선교를 위한 성서적 이해를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모든 민족에게 가라”는 명령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자의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땅위에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 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의 세상사랑은 선교의 근거이며 기초다. |